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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3/4)
계속 ↙
첫 번째 한계는 보살핌의 윤리가 여성(만)의 윤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관계되어 있다.
길리간은 자신의 이론이 성차를 주제로 하여 여성에게는 보살핌의 윤리를, 남성에게는 정의의 윤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다만 여성에게는 권리와 정의의 도덕 언어가 아닌 다른 도덕 언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보살핌의 윤리가 여성의 독특한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남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길리간의 보살핌의 윤리가 그 이론의 추출 방법과 이론화의 과정을 고려해 볼 때 남성에게까지 이 이론을 적용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즉 길리간의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 임신 중절을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근거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남성을 포함한 인간 일반에게 일반화시키는 데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길리간의 경험적 연구는 보살핌의 윤리가 인간 일반에게 타당한 도덕이며 또 타당한 도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다소
취약한 것이다.
보살핌의 윤리의 보편적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는 노딩스에게도 동일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보살핌의 윤리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느낌, 태도, 기억 등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윤리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여성과 모성애와 같은 여성의 특수한 경험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요컨대 보살핌의 윤리를 여성
특유의 윤리라고 주장하면서도 남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길리간과 노딩스의 주장은 모순이 있으며, 자신들의 실제적 연구는 보살핌이라는
것이 여성에게 특유한 윤리라는 결과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핌의 윤리는 보편성을 갖지 못하고 여성에게만 한정되는
윤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한계는 보살핌의 윤리를 확대 적용하는 데 있어서 그것의 적용 범위가
편협하다는 것이다.
보살핌의 윤리는 구체적 관계가 없는 대상으로 윤리를 확대하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무관계 무보살핌이라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어 편협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길리간은 낯선 타인들이 어떻게 보살핌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으며, 노딩스는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살핌의 윤리를 적용할 어떤
의무도 없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며 보편적 정의와 같은 남성의
윤리일 뿐이다. 따라서 그녀의 보살핌의 윤리는 분명하게 '보편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
보살핌의 윤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나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과 같이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그녀는 어떤 누구도 모든
사람을 보살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딩스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동들에 대하여
우리는 보살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상호적인 관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보살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먼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의 윤리의 적용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을 소홀히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상호적 관계 수립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여,
또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거나 관계가 먼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의 실천이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을 소홀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보살핌의 영역을 미리 제한하는 것은 편협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폐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화 혹은 변화의 가능성 속에 있으며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 속에
열려 있는 것이다. 노딩스의 보살핌의 윤리에 전제되어 있는 관계의 개념은 현존하는 관계의 변화성과 새로운 관계를 위한 개방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관계'라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어서 우리는 관계의 있고 없음과 관계의 깊고 얕음을 쉽게 판별할 수
없다. 예컨대
그녀가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고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에 대하여, 우리는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혹은 동일한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서로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는 그 적용 범위가 편협하다.
보살핌의 윤리의 편협성은 동물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동물
일반에 대하여 보살핌의 의무를 가지지 않으므로 우리와 직접 관련되는 소수의 애완 동물을 제외하고는 동물을 보살펴야 할 어떤 책임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보살핌에 대하여 반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그들과 순수하게 상호적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싱어(P. Singer)와 같은 동물 해방론의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인간 존재의 타
종족과의 관계성 내지는 공존성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있다.
노딩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자기 존재의 타인과의 상호 관계성 때문에 타 존재와 보살핌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상호 관계성은 인간이라는 종족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족에도 해당한다.
개아로서의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보살핌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듯이,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위해서도 인간 이외의 타 종족과 보살핌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보살핌의 윤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적용 범위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 관계의 깊이에 따라 보살핌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편협하며,
둘째로 상호성을 이유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인 동물들에 대해 보살핌의 필요성을 구체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편협하다.
보살핌의 윤리는 자신과의 관계의 유무나 깊이에 따라 보살핌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이기적 사고의 우려가 있으며,
다른 종족을 보살핌의 윤리의 대상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종 중심적 사고의 우려가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로는 위에서 논의한, 보편적 설득력의 결여와 적용상의 편협성 외에도 여성에게만 자기 희생을 강요하는 윤리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노딩스는 자연적 보살핌은 도덕 생활의 토대이고 모성애(mothering)는 자연적 보살핌의 최고의 모델이어서 모든 도덕 관계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여러 여성주의자들이 우려하듯이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로 오용될 수 있다.
예컨대 노딩스의
이러한 주장은 성차별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발전과 과업을 제쳐 두게 하고 타인의 발전과 과업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의
위치와 다른 보살피는 자들의 위치를 악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노딩스는 보살핌의 윤리가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윤리가 아니며 남성들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보살핌의 윤리의 실천에 있어서는 여성의 특수한 경험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도 다소 나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주장 또한 보살핌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오직 여성이라는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러한 우려는 모성애가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된 자녀 양육이나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여성의
특수한 경험이 보살핌의 성향을 증진시키거나 보살핌의 기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모성애와 보살핌의 관계에 있어 보살핌의 윤리가 원칙적으로 자기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은 자기
실현의 방편일 수도 있다는 노딩스의 주장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자기 희생을 특징으로 하는 모성애의 개념을 자기 희생을 거부하는
보살핌의 개념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모성애적 보살핌을 장려할 것과 동시에 보살핌이 자기 희생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사이의 모순은 전통적인 모성애의 개념을 바꾸기 전에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노딩스는 모성애에 대하여 깊게 논의하고 있지 않으며, 전통적인 모성애 개념과 자기 희생적이지 않은 보살핌의 개념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살핌의 윤리가 여성에게만 요구되어 오히려 여성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우려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즉 모성애는 전통적으로 자기 희생적인 덕목으로 이해되어 왔고 부성애는 사회적으로
장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의 우려는 타당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보살핌의 윤리는 전통적 자기 희생적 모성애를 최고의 덕으로
미화하여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5-2.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자비의 윤리
필자는 앞에서 보살핌의 윤리가 가지고 있는 이론상의 한계들을 지적하였는데, 다음에서는
이 한계들이 초기 불교의 자비의 윤리에 의해 이론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
보살핌의 윤리의 첫번째 한계로서 우리는 보살핌의 윤리가 그 이론화의
과정에 있어서 여성 피험자 혹은 여성만이 겪는 경험이나 모성애와 같은 여성으로부터 추출된 특징에 의거하고 있어서 남성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즉 보살핌의 윤리는 주로 여성의 특수 경험에 의존하여 이론화된 윤리이기 때문에 인간 일반의 보편
윤리라고 주장하기에는 그 이론적 근거가 취약하다.
마치 길리간과 노딩스가 콜베르크가 제시한 도덕 발달 개념과 칸트의 윤리 이론이
여성의 윤리 개념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여 이들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
하듯이, 마찬가지로
칸트와 콜베르크의 입장에서 윤리를
이해하는 사람도 이와 똑같은 이유를 들어 보살핌의 윤리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핌의 윤리와 달리 자비의 윤리의 원리는 여성 특유의 경험에 의거해 있거나 여성적인 특징에 호소하고 있지 않다.
자비의 윤리의
이론화에는 남녀의 성차가 전제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자비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로 깔려 있다.
자비의 윤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초기 불교는 남녀의 성차 ― 이것이 선천적이든지 후천적이든지 간에
― 를 의식한 어떠한 전제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2)
필자는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 가운데 하나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들을 적용 대상으로 포함한 것도 아니어서 적용상 편협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비의 윤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까지를 자비의 대상으로 한다. 자비의 윤리가 갖는 이러한 강점은 그 윤리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확고하다는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연기설과 윤회설은 각각 자비의 대상을 공간적·시간적으로 무한히 확대하고 있다.
공간적 측면에서 자비의 대상과 관련하여 연기설을 해석해 보면,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및 생명체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사람들 및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 존재들의 상호 관계성과 상호 관계성 속에서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어느 한 사람도 혹은 어느 한 생명체도 빠뜨리지 않고 자비의 대상에 포함된다.
더 나아가서 연기설은 인간과 생명체뿐 아니라
무생물적 존재 혹은 모든 자연 환경에까지 자비의 영역을 확대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시간적 측면에서 자비의 대상과 관련하여 윤회설을 해석해 보면,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의 존재들까지 자비의 대상이 된다.
현재의
나는 과거세에 인간이었을 수도 있고 동물이었을 수도 있다. 과거세에 내가 인간이었다면 오늘의 내가 현세의 특정 누구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라도 과거세에 나는 그 사람의 친구였을 수도 혹은 가족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과거세에 맺어졌던 관계로 인하여
나는 현세에서 직접적으로 무관하게 보이는 사람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또 과거세에 내가 동물이었다면 현세에서 그 동물과도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가 미래세의 나의 존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의 존재의 윤회를 멈추지
않는 한, 나의 존재는 미래세까지 계속된다.
미래세에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오늘의 나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가 있으며 이는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상과 같이 연기설과 윤회설은 관계의 무한성과 가능성에 입각해서 공간적
· 시간적으로 자비의 대상을 무한히 확대시키고 있어서
보살핌의 윤리가 갖는 이론적 편협성을 극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혹자에게는 자비의 대상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이 오히려 현실성이 없는 말로 들릴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비의 윤리의 이론적 토대가 보살핌의 윤리의 이론적 토대가 안고 있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비의 윤리를 적용할 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고 자비를 적용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정도의 자비를 적용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비의 확대
범위를 이상적으로 무한히 설정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 적용에 있어서는 적용의 영역과 한계
― 자비의 적용의 구체적 원리 ― 가 설정되어 있어서
자비 실천의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곤란을 방지하고 있다.
그러면 자비를 적용하는 데 있어 구체적 원리들은 무엇인가?
첫째, 불교는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의 실존적 괴로움에 대한 여실한 지각으로부터
출발하므로 인간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 판단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간을 중심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 이외의 종족들을 도구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 지배 종속 관계가 아닌 공존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공존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동물에 대하여 인간을, 무생물체에 대하여
생명체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 자신과 보다 가깝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셋째로 자비를
행동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중도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모든 생물이 자비의 대상이라고 하여 공기 중의 세균까지
보호하려 한다면 이것은 극단적으로 자비를 적용한 것일 것이다.
자기 희생이나 극단적 이기주의가 바람직한 자비일 수 없는 것도 이 둘
모두가 중도의 원리를 벗어나 자비를 극단적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도의 원리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고려되어야 할
원리이다.
자비의 윤리가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은 보살핌의 윤리가 갖지 않는 특징을 자비의 윤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는 구체적인 상황과 경험적 맥락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즉
비인격적·추상적 차원에서는 보살핌의 윤리가 기능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비의 윤리는 보살핌의 윤리와 마찬가지로 상황성, 경험성,
맥락성, 구체성을 그 특징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와 반대되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자비의 윤리에는 모든 생명체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무형의 존재들에게까지 확산 적용해야 하는 차원이 존재하는데, 이 차원은 구체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 추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비의 윤리는 보살핌의 윤리처럼 윤리의 폭을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관계 속에만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추상적이고 비경험적인 관계 속에까지 윤리의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즉 구체적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이 구체적 관계가
추상적 차원으로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어 윤리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혀 두고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이론적 장점 이외에도 자비의 윤리는 보살핌의 윤리가 갖지 못하는 자비를 체화하고 확산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 관계 혹은 추상적 차원에서 자비를 실천하는 효과적 방법은 명상법들이다.
마음의 평정과 지혜를 이끌어 내는 명상 그리고
주의 집중적 명상(sati)은 구체적 관계와 추상적 차원에서 자비를 습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체적 행동을 해야 할 때는 행동 속에서, 그리고 구체적 행동이 수반되지 않을 때는 의식 속에서 자비를 실천한다.
따라서 자비의
행동이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자비는 내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한 순간도 놓침이 없이 자비로 일관한 삶이 요구되고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명상법들이 필수적이다. 자비의 윤리에서는 자비가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도 자비라는 태도의 형성이 전제되어 있다.
즉 자비의 윤리는 자비의 외적
표현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명상적 주의 집중이라는 수련을 통해 자비의 내면화를 우선시하고 강조한다. 자비의 내면화, 그리고 내면화된
자비를 관계 속에서 표현하는 자비의 외면화는 내외적으로 자비를 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비의 체화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자비의 윤리가 자비를 실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비를 의식화하고 지향하는 인간성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자비를 체화하여
자비로운 인간성을 형성한 사람은 사유, 언어, 행위의 세 영역에 있어서 항상 자비를 동반하는데, 이 세 영역에서의 자비의 동반은 곧
자비가 내외적으로 체화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논의하였듯이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구체적으로 외화된 행동으로서의 보살핌이 강조되어 관념 속에서의 보살핌은 의의가 없다.
보살핌의 성품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상대방의 반응을 유도해 내지 않으면
완전한 보살핌이라고 할 수 없다.
자비의 윤리에서는 태도로서의 자비가,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난 행동을 통한 보살핌이 강조된다.
따라서 자비의
윤리에서는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에게도 자비의 실천이 도달할 수 있지만,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구체적 상호 작용을 통한 행동이
요구되므로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에게 보살핌이 실행되지 않는다.
즉 자비의 윤리에서와는 달리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태도에만 그치는
보살핌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자비의 윤리에서는 구체적 행동으로 표출된 자비뿐만 아니라 내재된 힘 혹은 태도로서의 자비에도 가치를
두고 있다.
Ⅵ. 맺음말: 이상적인 윤리
필자는 본론에서 초기 불교의 자비의 윤리와 여성주의 보살핌의 윤리의 개념, 이론적
토대, 발달 과정 등을 중심으로 하여 두 윤리의 유사성을 고찰하고, 보살핌의 윤리가 갖는 이론적 한계들을 자비의 윤리가 보완해 줄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였다.
이제 필자는 이 연구의 결과를 간략히 설명하고 자비와 보살핌의 윤리가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윤리를 유추해 보고자 한다. 비록 두 윤리 체계 사이에 본질적 상이성은 존재하지만 윤리 내용의 중요 부분에 있어서는 긴밀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두 윤리는
인간 윤리의 핵심을 자비와 보살핌으로 보고 이것들의 원천이 정서나 공감과 같은 인간의 감성적 측면과 인간 존재의 상호 의존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또한 두 윤리 체계는 자비와 보살핌이 발달하고 전개되는 데 있어서도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고
본다. 보살핌의 윤리가 갖는 한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윤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분적 구도를 전제로 하고
있어 남성의 윤리를 설명하는 데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윤리의 적용 범위가 편협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한계는 보살핌의 윤리의 두 가지 핵심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즉
도덕에 있어서 보살핌이라는 여성 특유의 사고와 목소리가 있다는 주장과 보살핌의 윤리가 남성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보살핌의 윤리
이론가들의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한계는 보살핌의 윤리의
주창자들이 칸트의 추상적·보편적 윤리관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의식하여 보살핌의 윤리를 구체적 관계 속에만 국한시키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연구에서 필자는 이 두 가지 한계가 자비의 윤리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로 자비의 윤리는 이론 구성에
있어서 특정의 성과 밀접한 관계를 설정하거나 성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동일한 설득력이
있다.
둘째로 자비의 윤리는 자비의 구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추상적 차원을 설정함으로써 윤리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 결과 자비의 윤리의
적용 범위는 편협하게 한정되지 않고 무한히 열려 있다.
☞그러면 이 두 윤리 체계가 자비와 보살핌이라는 윤리를 통하여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상적인 윤리는 무엇일까
?
자비와
보살핌을 중심으로 볼 때 두 윤리체계는 윤리, 윤리의 범위, 이상적 윤리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
두 윤리 체계가
내릴 수 있는 윤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수 있으므로 편의상 윤리의 범위부터 설정해 보자면, 윤리는 자신과 타인(초기 불교의 경우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와 여타의 모든 존재까지 포함)을 주요 범위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윤리의 주요 범위를 준거로 하여 윤리를
정의한다면, 윤리는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다른 존재)에 대한 바람직한 행동과 바람직한 관계 맺음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 정의로부터 우리는 두 윤리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자비와 보살핌으로 관계 맺을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비와 보살핌이라는 말은 기존 윤리의 핵심이 되는 말들인 정의, 권리, 의무, 공리, 원리, 규칙 등과 다르며
기존의 윤리에서 간과하고 있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성을 윤리의 토대로 강조하고 있다.
두 윤리에서 강조하고 있는 상호성의 개념은
자비와 보살핌이 타인이나 다른 존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나 보살핌은 타인과
다른 존재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며 나 자신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양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두 윤리는 무지의 베일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각된 상황 속에서 자신과 타인 양자의 (혹은 양자가 공유하는) 구체적 복지를
위하여 행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여기에서 '자신과 타인 양자가 공유하는'이라는 말은 기존의 윤리 이론들과 비교해 볼 때 상이한
전제를 깔고 있다.
기존의 정의나 권리 중심의 윤리에서는 자신과 타자를 양분적 혹은 대립적 존재로 설정한다.
자신과 타자가 대립적
존재로 설정된 상황에서는 자신과 타자가 공유하는 공동의 이익이나 복지를 설정하기보다는
각각에게 개별적으로 얻어지는 최대치의 이익이나
복지를 설정한다.
이 상황에서의 윤리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양자 각각에게 상이한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줄 것이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자비와 보살핌의 윤리는 자신과 타자의 이익과 복지 혹은 행동의 목표가 항상 상이하게 분리되어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공유될 수 있다고 보며 공유되는 복지를 이상으로 한다.
즉 기존의 윤리 체계들이 양자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하여 두 윤리 체계는 양자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또 그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가 나의 몫을 어떻게 챙겨 보장할 것이냐에 관심을 두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몫을 타인에게 어떻게 베풀 것이냐에
윤리적 관심을 두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자비와 보살핌의 윤리에서 자신과 타자의 이익 혹은 행위의 목표가 조화롭게 고려되어 궁극에서는 자신과 타자의 이익이나
윤리적 목표가 공유되는 것을 윤리의 이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필자는 본고에서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가
이기주의는 물론 자기 희생을 거부함을 살펴보았다.
두 윤리 체계는 오히려 자신의 복지 혹은 자신의 자아 실현의 측면에서 요구되는 자기
이익적 측면을 건전한 것으로 수용한다.
즉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측면이
― 이것이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닌 한
―
수용되고 있고, 이것이 각 윤리 체계가 갖는 도덕의 목적과 상치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자신의 이익 추구가 도덕의 목적에
상치되지 않고 오히려 수용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도덕의 이상
― 이상적 도덕은 자신의 이익이나 관점을 떠나
보다 타인을
고려하고 자신을 객관화시켜 탈개인화된 상태에서 행위하는 것이라는 주장
― 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자기 희생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고 또 동시에 이기적 자비와 보살핌
― 예컨대 오직 자신의 괴로움의
소멸과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타인에게 자비를 베푼다거나, 혹은
자신의 보살핌의 충동을 행동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보살핌을 실천한다든지 하는 것
― 을 지양한다.
자신과 타인의 이익의 관계에 대하여 두
윤리는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양자를 공유할 수 있다고 보아 일원적으로 파악한다.
필자는 자신과 타인의 이익이 관련되는 양식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유형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이
대립되거나 배치되어 양자 사이에 어떠한 공유 부분도 없는 경우이다. 이 경우를 원으로 그려 본다면 두 개의 독립된 원을 그릴 수
있고, 이 두 원에는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다.
둘째 유형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 사이에 공유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를
원으로 나타내면 두 원은 서로 겹치는 부분을 갖는다.
셋째의 유형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이 일치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타인이
추구하는 바와 대립되지 않고 공유되는 경우이다. 이 유형에서 두 원은 완전히 겹쳐 하나의 원을 이룬다.
자신과 타인의 이익 사이의 관계 혹은 자신과 타인의 행동 목표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가 이상으로 하는
유형은 양자의 이익 혹은 행동 목표가 완전하게 공유되는 셋째 유형이라고 생각된다.
이 유형에서는 양자의 이익이나 행동 목표가 갈등
관계에 있지 않아서, 자신의 이익이나 행동 목표가 곧 타인의 것이 되고 타인의 이익이나 행동 목표가 곧 자신의 것이 되어 일원적으로
동일시된다.
이 유형에서는 타인의 괴로움과 기쁨이 나의 괴로움과 기쁨과 동일시되고, 감정의 전이나 몰입 속에서 자신의 정서와 타인의
정서가 합치되어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혹자는 셋째의 유형이 행동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서 개인의 취향이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목표 실현에
있어서의 동일성 내지는 획일성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윤리는 행동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인정한다.
두 윤리가 지향하는 셋째의 유형에서 요구되는 것은, 행동 방식이 타인의 그것과 동일하게 되어 획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이한 취향과 행동 방식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여 공유하는 것이다.
이 유형은 자신의 취향과 행동방식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과 타인의 이익이나 행동 목표의 공유라는 윤리적 이상은 규칙의 제정이나
준수에 의하여 그 본질적 내용이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상은 인간에게 소여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길러지고 완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자비의 윤리에서는 명상적 수행을 통해 자비를 내적으로 닦고 습관화하여 동시에 이를 외적으로 드러낸다.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인간
관계에서 따뜻한 정서를 반복적으로 체험하여 보살핌의 정서와 태도를 축적함으로써 타인을 자신 속에서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타인
속으로 몰입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이상이 달성될 수 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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