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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2/4)
계속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길리간은 책임감과 자기 의식의 발달에 따른 도덕 의식의 성장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살핌의 윤리가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노딩스는 길리간과 다른 각도에서 선천적인 보살핌의 충동의 전이, 상호성의 원리에 의한 보살핌,
자발적인 무의무적 의무, 그리고 초규율적 보살핌 등의 개념으로 보살핌이 발전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노딩스에 의하면 보살피고자 하는 선천적 충동은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결심을 동반하면서 윤리적으로 의무화된다. 윤리적 의무화의
시발점은 보살피는 자가 자신의 최초의 보살피고자 하는 충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보살핌을 받는 자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서약하는 것이다.
이때 최초의 충동은 감정의 단계를 넘어 '나는 해야 한다(I must)'는 단계로 이행하여 스스로에게 서약한 것을
따라야 한다(I ought)는 순수한 도덕 감정으로 발전한다.
예컨대 보살핌을 윤리적으로 의무화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경우 이 사람의 요구에 부응하여 나는 최소한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은 도덕적 혹은 윤리적 정언 명령인 당위적 의무(ought로서의 의무)와 연결되어 있으나
이와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노딩스에 의하면 의무(must로서의 의무)는 욕구(desire)로부터 나온 것이고 이 욕구는 보살핌을
받는 자를 위하여 행동하려는 혹은 보살피려는 선천적 충동이기 때문이다.
의무감은 보살핌을 받는 자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연적 충동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자연적 충동을
'수용한다(accept)'는 것이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충동은 선택적이어서 쉽게 거부될 수도 있다.
만일 도덕적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면 이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더 본초적이고 자연적인 욕구로부터 도덕적이고자 하는 욕구가
유도되는 것이다.
요컨대 노딩스는 보살핌의 윤리의 기원을 칸트와 같이 순수한 이성적 동기에 의거한 의무감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소멸되지 않는
본래적 충동 혹은 욕구에서 찾고 있다. 보살피고자 하는 충동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인간의 내면에 지속적으로 잠재해 있으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보살핌은 보살핌이 실행되기 훨씬 이전부터 의무의 개념으로 잠재해 있을 수 있으며, 현재 지속되고 있는
관계와 앞으로의 관계 가능성 속에서 의무로 개념화되어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러면 자기 속에서 개념화된 보살핌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일까
?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보살핌이 현실화되는
조건으로서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용성과 상호성(mutuality)이다. 보살핌을 받는 자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보살피는 자의 모든 태도와 행동 자체가 수용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용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고립되고
객관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타자에로 몰입하는 것이다. 수용성은 보살핌의 처음 단계뿐만 아니라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즉
처음에 우리는 '거기에 있는 것'을 수용하고 마지막에는 '여기에 있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거기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
수용한다는
것은 보살핌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상호 작용 속에서 학습이나 이성적 작용을 거치지 않고 자신을 총체적으로 타자 속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용의 궁극적 형태는 양방에 의한 상호 수용이며 이때에는 양방이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다.
양방이 서로를
수용하고 서로 보살피는 것은 개별적 자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아의 새로운 자아로의 끊임없는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는 자에 의해 보살핌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완성될 수 있다. 보살핌을 받는 자가
'받아들임(apprehension)'의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그(녀)는 오히려 취급받는다고 느낄 것이며 보살피는 자의 대상물이라고
느낄 것이다.
노딩스에 의하면 나의 보살핌이 상대방에 의해 인지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사람과 보살핌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나의 보살핌이 그 사람에게 도달되지 않을 때 보살핌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실행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보살핌의 윤리에 있어서 상호성이
갖는 의미이다.
그런데 보살핌의 윤리에 의하면 비록 우리는 운명적으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잠정적으로 보살핌의 윤리를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보살핌의 윤리는 상호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보살핌이 대상에 의해 수용되고 인정받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으므로, 보살피는 자는 보살핌에 의한 관계를 설정하기 전에 보살핌의 완성
가능성을 검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타인 속에서 보살핌의 완성 가능성이 없으면 우리는 '내가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보살핌의 윤리가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노딩스는 우리가 아프리카의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까지를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갖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경우 우리와 아프리카 아이들 사이에는 구체적 관계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보살핌이 타자 속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상호성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의 완성 가능성이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살핌은 부분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책임의 측면이 있지만 그 윤리가 갖는 상호성의 특징 때문에
당위(ought)의 의미에서의 의무가 될 수는 없다. 보살핌의 개념 자체가 상호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보살핌을 받는 자가
보살핌을 수용하지 않는 경우 보살핌은 계속될 수 없다.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는 자에 의해 거부될 수 있다. 보살핌이 설령 당위로서
인식되어 우리가 당위감에서 보살핌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일단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에 대해 반응하기로 결정하면
당위감은 사라지게 된다.
예컨대 누군가가 긴박한 상황에서 보살핌을 요청했을 때 일시적으로 당위감을 가질 수 있으나 보살핌의 윤리가
일단 실행되기 시작하면 의무론적 당위감은 사라진다.
요컨대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상대방의 요청에 의해 의무적으로 촉발될 수도
있으나 보살핌의 윤리가 일단 실행되면 의무감이 존립할 틈이 사라진다.
보살핌이 의무의 형태로 내재화된 경우에도 그것이 아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고 상호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보살핌이라고 할 수 없다. 보살핌은 타자가 요구한다고 하여 혹은 일방적으로 베푼다고 하여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피는 자가
보살핌을 실행하고, 실행된 보살핌이 보살핌을 받는 자에게 수용될 때 비로소 보살핌이 성립한다.
노딩스는 보살핌을 받는 자가 보살핌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보살피는 자의 보살핌이 완성된다고 한다.
요컨대 그녀는 보살핌의 완성은 타인 속에서만 가능하며 보살핌이라는
윤리가 참으로 실행된다는 것은 보살핌을 받는 자가 보살핌을 인지하고 수용한 연후에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보살피는 자는 한편으로는 타자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감지하여 이를 전적으로 타자의 입장에서 응답하여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보살핌이 타자에 의해서도 수용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보살피기 시작할 때 보살핌의 윤리가 성립할 것이다.
보살피는 자는 보살핌을 받는 자의 요구를 수용할 때에 보살피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몰입은..
첫째로 보살피는 자가 보살핌을
받는 자 속으로 들어가고 보살핌을 받는 자가 보살피는 자 속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에서의 몰입으로 이해된다.
둘째로 몰입은 보살피는 자가
실제적으로 보살피는 행위에 몰두한다는 의미에서의 몰입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몰입의 중요한 특징은 몰입이 전적으로 자발적 동기나
자발적 수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의도적 노력이나 어떤 의무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보살핌의 윤리가 상호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보살핌이 의무론적 당위보다는 자발적 충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필자는 보살핌의 윤리가 전개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더 덧붙이려 한다.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는
자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하여 초규율적이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규칙보다는 사람이 처한 개별적 혹은 구체적
상황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행위자가 특정 규칙에 충실했는가보다는 그가 보살핌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즉
보살핌을 받는 자의 요구에 얼마나 순수하게 반응했느냐가 중요하다.
현실의 법과 보살핌의 윤리가 모순이 될 때에는 보살핌을 유발시키는
본초적인 관계성에 충실하는 것이 현실의 법을 준수하는 것보다도 우위에 놓인다.
그래서 어떤 원칙이나 법이 보살핌과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상 보살핌이 우선한다.
예컨대 학교에 가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자 결석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 당국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들을 처벌받게 하여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 법칙보다 사람이 더 귀중하다는
보살핌의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핌의 윤리에 충실하기 위하여 법칙을 위반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Ⅳ.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유사성
4-1.
간과할 수 없는 상이성
지금까지는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의의, 이론적 토대, 전개 과정을 각각의
체계 내에서 독립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앞에서 논의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두 윤리 사이의 유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서
필자는 간과할 수 없는 상이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초기 불교 윤리는 자비와 보살핌을 실천하는 태도에 있어서 자비의 대상,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보살핌의 윤리는 보살핌의 대상과 과정에 대한 몰입을 강조한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무집착의 개념은 불교 윤리의 핵심이기 때문에 자비의 윤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자비와 관련하여 무집착은 우선 자비의 행동 자체에 정서적 애착심을 갖지 않고 자비의 대상에 대해서도 정서적 애착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자비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 표현으로서 타인의 괴로움을 함께 느껴 이를 제거하려 하고 타인의
즐거움에 공감하는 것이지만 괴로움과 즐거움 자체에 매몰되거나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관조적 자세를 잃지 않을 것이 요구된다.
자비를 행하는 자는 자비를 받는 대상과 함께 느끼고 공감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지만, 주의 집중적 명상(sati)에 의해 일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이 갖는 느낌을 대상화시켜 관찰한다.
자신의 느낌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느낌 그 자체, 자비의 대상, 자비의 과정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의 대상화는 또한 자비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자비를 베푸는 과정에서 자비의 결과에
대해 기대하거나 우려하지 않고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되 자신의 자비행 자체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자비의 실천에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쌍방성이 요구되지 않는 것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자비행의 결과에 대한 기대나
우려는 자비를 받는 자의 태도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자비행에 대한 우려나 기대 없이 단순한 마음에서 베푸는 자비는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반응을 유발시킬 수도 있고 눈에 보이는 현실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비의
행위가 전달되더라도 어떠한 반응도 없을 수 있고 자비의 행위에 대한 효과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때 만일 집착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자비를 베푸는 자는 실망할 수도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살핌의 윤리는 주의 집중적 명상을 토대로 무집착의 태도 속에서 실천되는 자비의 윤리와 매우 대조적이다. 보살핌의 윤리에
있어서는 타자와 보살핌 자체에의 몰입이 요구되며, 타자나 보살핌의 내용에 대한 대상화의 과정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자비의
윤리가 자신이 느끼는 정서를 대상화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식의 흐름에 대한 관찰을 요구하여 집착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하는 데 비하여
보살핌의 윤리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재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4-2.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유사성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윤리의 토대로서 인간 존재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
윤리의 원천으로서 정서적 측면의 강조, 규칙이나 원리의 준수보다는 좋은 인품이나 습관 형성의 강조, 윤리의 필요성의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율성의 전제, 자기 희생의 거부 등의 입장에서 동일한 관점을 취한다.
1)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발전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성 혹은
상호성의 인식에 의존해 있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기 불교에서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 인식에서,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 관계성의 인식에서 윤리가 성립한다.
두 윤리 체계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과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 혹은 상호성을 떠나서는 각각의 윤리 체계가 지향하는 윤리의 목적도 달성할 수 없다.
초기 불교에서 윤리의 목적은 인간의 실존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고,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보살핌의 충동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보살핌을 실천한다.
따라서 두 윤리 체계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복의 성취와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 상호 의존적 존재인 인간은 자비와 보살핌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 두 윤리는 인간의 상호 의존성이나 관계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절대적 원리나 규칙의 수용을 도덕 발달로 보는 칸트나 콜베르크의
도덕 이론과 다르다.
칸트의 입장에서 도덕 법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준수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 도덕 법칙은 인간의 상호
의존성이나 관계성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 법칙을 인간 관계성보다 우위에 두지만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법칙보다 인간의 관계성을 우위에 둔다.
2)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관계와
상호성의 인식에 따라 발전하므로, 두 윤리의 실천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민감할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두 윤리는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다.
두 윤리는 사건의 맥락을 떠나 있지도 않으며 경험 세계를 떠난 곳에서 행동의
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 모두 자기가 속한 생활 환경 속에서의 살아 있는 경험을 요구한다. 두 윤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도덕 법칙으로서의 윤리에 대해 비판적이다.
따라서 두 윤리는 절대주의적 윤리관이나 법칙 중심의 윤리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보살핌의 윤리는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타자에의 (그래서 또한 자아에의) 몰입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고, 자비의 윤리는 개인과
상황에 대한 감수성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윤리는 상황의 차이와 개인의 차이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각 윤리의 실천 방법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다. 따라서 윤리 실천자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들에 따른 자비와 보살핌의 적용에 있어서
적합성이나 독창성이 중요하다.
불교 윤리의 실천에 있어서 핵심 개념인 '우파야'(upay , skill--in--means, 方便)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자비를 받는 사람의 성격과 상황의 특이성 내지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을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3)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의 원천은
감정 이입, 동정 등의 정서적 느낌이다. 그래서 두 윤리는 이성적 원리가 명령하는 윤리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윤리를
지향한다.
자비의 윤리는 한 순간도 놓침이 없이 자비의 마음을 길러 매순간 자연적으로 실천하는 자비를 중요시하고, 보살핌의 윤리는
선천적으로 내재된 충동에서 비롯된 보살핌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이르도록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두 윤리의 원천이
인위적인 노력 이전의 정서라고 할지라도 발전된 형태의 자비와 보살핌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 그래서 두 윤리는 원초적인
정서와 노력을 바탕으로 하여 바람직하게 형성된 정서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바람직하게 형성된 자비는 자비의 마음을 닦는
수행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학습을 통해 축적되고 그것에 의해 형성된 좀더 완벽한 정서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보살핌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점은 초기 불교에서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 그리고 보살핌의 윤리에서 과거의 보살핌의 경험과 교육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비와 보살핌의 정서 (그리고 이와 함께 외화된 행동)는 그것의 완성이나 성숙의 정도에 따라 그 표출
방식의 자연스러움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좀더 성숙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자비와 보살핌은 더욱 완성된 형태의 자연스러움을
동반할 것이다.
더 성숙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더 완성된 형태의 자비와 보살핌을 표출한다는 것은 습관에 의해 꾸준히 형성된 바람직한 인격체를
전제하고 있다.
자비와 보살핌은 다른 덕목들로부터 독립된 덕목이라기보다는 다른 덕목들의 성장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어서 다른 덕목이
체화된 인격체를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윤리 체계가 윤리의 실천 주체로 하여금 자비와 보살핌을 실천함으로써 각자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궁극적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윤리 체계는 덕의 일회적인 실천보다도 그 궁극적 발전 단계에 있어서는 자비와 보살핌을 체화하여 인품 속에 습관화할 것을
요구한다.
한두 번의 자비와 한두 번의 보살핌의 행위에 의해 두 윤리는 완성될 수 없으며 지속적인 실천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대한 이해와도 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덕 있는 행동의 일회적 표출보다도 덕 있는 행동의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인격을 중시하였듯이 두 윤리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다.
4)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의 인식과 윤리의 실천에 있어서 자아의 자율성을 전제하고 있다.
두 윤리는 자연적 자발성에 호소하는 윤리 실천의 초기
단계부터 덕목의 내면화에 의거하는 윤리 실천의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 외부의 물리적 힘이나 강제적 규율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의 인식과
판단을 기초로 자신의 준칙을 따를 것을 중요시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인식과 행위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의 사고와 이러한 사고에 입각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자비의
윤리에서 자율성은 일차적으로
몸, 언어, 생각의 영역에서 스스로를 규제하는 힘으로서 나타나고, 이차적으로는 괴로움, 연기, 윤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 후에 이 인식을 현실의 관계에 적용하여 자비의 도덕을 자주적으로 실천하는 데서 나타난다.
보살핌의 윤리에서도 보살핌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자아의 자율성이 전제되어 있다.
길리간에 의하면 보살핌의 주체는 행동을
결정짓는 원칙이 없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의 과도기를 겪으면서 자주적이고 적극적으로 타협점을 모색해 감으로써 다음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해 간다.
과도기에 자아가 겪는 인식과 실천상의 혼돈은 자주적인 인식, 자주적인 선택, 그리고 자주적 실천으로 귀결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아는 상황의 인식, 행동의 선택, 선택된 행동의 실천에 있어서 스스로의 주체적 이해와 판단에 따른다.
이는 노딩스의
보살핌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보살핌의 상황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판단에 따라 보살핌을 적용할 것이냐 거부할 것인가를
의지적으로 결정한다.
즉 보살핌은 본질적으로는 자연적 충동에 의거한 것이지만, 윤리 주체는 보살핌의 충동을 모든 관계에서 그리고 모든
수준에서 자아의 판단에 따라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다.
보살핌을 실천한다는 결정을 내리면 자아는 보살핌의 표출 방식을
선택하여 주체적으로 실천한다.
특히 주체적 실천에 있어서는 자주적 판단에 의거하여 절대적 규칙을 무시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에 있어서 윤리 주체가 갖는 자율성은 상황의 인식과 판단, 행동의 선택, 그리고 선택된 행동의 표출 방식을 결정하는 데서
드러난다.
요컨대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윤리 주체의 자율성을 극대화한 윤리적 상황에 대한 주체적 이해, 주체적 판단, 그리고
주체적 실천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두 윤리의 전 과정은 윤리 주체의 자율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특히 윤리의 실천에
있어서 주체적 자율성은 두 윤리가 마음 속에 내면화되고 체화되었을 때 극에 달한다. 내면화되고 체화된 윤리는 '이웃을 사랑하라' 혹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 혹은 명령적 규칙에 따르는 단계를 초월한다.
5)
자비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는 자기
희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두 윤리는 자비의 대상과 보살핌의 대상으로서 자신과 타인을 모두 동등하게 고려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타인의 희생이 자신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화될 수 없듯이 타인의 복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왜 자기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는가 ? 자비와 보살핌의 윤리가 심리적으로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왜 자기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두 윤리는 자신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과 자신의 복지를 추구 (혹은 자신의 존재의 참다운 실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의
실존적 인식에서 비롯된 자신의 괴로운 현실의 지각 그리고 이 괴로운 현실과 타자의 연관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괴로움을 직시하고
그것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윤리의 실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괴로움의 제거이고―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괴로움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타인의 괴로움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차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두 윤리의 목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며, 이때 타인과 관계하는 방법이 바로 자비와 보살핌이다. 이 입장에서는 타인의 자유를 위해 나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요컨대 초기 불교에서는 자기 희생적 자비를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자신과 타인의 복지 모두를 함께 고려하는 자비의 실천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보살핌의 윤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딩스는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왜 자기 희생이 허용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이론
속에는 그것이 함축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는 상호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보살피는 자는
보살핌을 받는 자의 반응을 기초로 보살핌의 완성 가능성을 판단하여 보살핌의 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할 수 있다.
만일 보살핌의 윤리가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면 보살핌의 윤리에 필수적인 상호성의 준칙이 무시되는 경우를 설정해야 한다.
보살핌을 받는 자가 보살핌을 수용하지
않아서 상호성의 준칙이 지켜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살피는 자가 계속하여 그(녀)를 보살핀다면 이것은 자기 희생적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살핌의 윤리에서는 보살피는 자가 일반적으로 보살핌을 받는 자의 수용성 혹은 반응성을 통하여 자신의 성장과
실현이라는 파생 효과를 얻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핌의 윤리의 상호성의 준칙은 보살피는 자는 자신의 능력의 한도에 따라 보살피는 대상을
제한해야 하고 자기 희생이 요구되는 보살핌을 애당초부터 허용하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살핌의 윤리는 이론적으로 자기 희생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단 보살핌의 윤리가 시작되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
일단 보살핌의 윤리가 실행되기 시작하면 보살핌을 받는 자와
보살핌을 베푸는 자의 목표와 이익이 서로 상치되지 않고 보살핌을 받는 자가 누리는 행복이 보살피는 자의 행복과 동일시되므로 보살핌의
윤리의 전개 과정 속에서도 자기 희생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이 맥락에서 노딩스의 '보살핀다는 것은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이라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보살핌의 과정 속에서는 타인의 행복이나 성취가 나의 행복이며
나의 성취가 되므로 자기 희생이란 있을 수 없다.
노딩스는 보살핌의 윤리에서 관점의 이원성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를 이원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보살핌의 과정
중에서 보살피는 자의 봉사와 보살핌을 받는 자가 누리는 혜택 등에 대해서는 일원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나 자신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존재이므로 내가 보살피는 자로서 타인을 향해 나아갈 때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타인과의 관계선상에서 나 자신이 규정되고 타인과의 관계선상에서만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은 자신의 존재성을 실현해가는 계기이기도 하므로 보살핌을 받는 자의 자기 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Ⅴ.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자비의 윤리
5-1. 보살핌의 윤리의
한계
보살핌의 윤리는 기존의 도덕 이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여 윤리학 이론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보살핌의 윤리는 여성의 윤리 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이 있지만
남성의 윤리 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설득력이 적다.
혹자는 보살핌의 윤리가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근거로 이론을 제안하는 측면이
있지만 보살핌과 정의, 혹은 책임감과 권리 등의 개념을 근거로 하여 이론을 정립하는 측면도 있으므로 성차를 초월한 보편적 윤리 이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살핌이나 책임감 등의 핵심 개념들이 주로 여성 피험자나 여성의 특수 경험에 의존하여
발견되고 완성되었으므로 남성에게까지 똑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째로 자신과 직접적으로 상호적
관계가 있는 사람 혹은 동물에게만 보살핌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윤리의 적용 범위가 편협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첫 번째 한계는 보살핌의 윤리가 여성(만)의 윤리라는 ->>>다음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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