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漢詩 批評 方法論 試考(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
 -'以禪喩詩'論을 中心으로(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
裵  奎  範     경희대 대학원 문학박사과정 수료, 경희대 강사.
「無衣子 慧諶 文學 硏究」,「草衣禪師의 茶詩 考察」,「滄浪詩話 以禪喩詩 考察」

 

       목     차          | (1/3) | (2/3) | (3/3) |
   1. 들어가는 말 ◁ 첫 페이지 (1/3)
   2. 佛敎文學(불교문학)과 佛家文學, 그리고 禪詩(선시)와 佛家漢詩(불가한시)
   3. 佛家漢詩 批評(비평) 方法論(방법론)의 提示(제시)   중간>'悟'의 단계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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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以禪喩詩(이선유시)' 方法論의 佛家漢詩 適用(불가한시 적용)
      (1) '未悟(미오)' 경지의 詩     (2) '悟' 경지의 詩
 
      ↘ 현재 페이지 (3/3) 세 번째 ▶ (2)중간> 첫째 수의 질문...
      (3) '妙悟(묘오)' 경지의 詩
   5. 나오는 말              參 考 文 獻


     앞장 계속
 
이제 첫째 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는 어떻게 해서 이 시가 '悟' 경지의 시에 해당하느냐는 질문과도 통한다. 우리 인간은 생리 조직체인 身體(신체)와 외부 대상에 대해 표상 · 지각 등의 의식 작용을 하는 自我(자아), 그리고 자아와는 다른 知覺的(지각적) 世界, 즉 六塵對境(육진대경)의 色法의 世界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중 생리 조직으로서의 신체는 몇 가지 물질적 요소의 우연한 결합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緣影之心(연영지심)한 자아의 공허함을 깨치는 것을 人空(인공)이라 한다.
 
이에 반해 고정적인 自性을 가지고 모든 시간을 일관하여 지속적으로 自在하는 것은 없다는 諸行無常(제행무상)을 깨닫는 것을 法空(법공)이라고 한다. '悟'의 경지는 바로 人空과 法空을 깨달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主體(주체)와 客體(객체)의 대립을 버린 상태, 無念(무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 시는 이런 경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世間何所有(세간하소유)   세상사에 있는 것 무엇인가
       身外更無餘(신외갱무여)   몸밖에 남는 것 없네.

 
       四大終離山(사대종리산)   사대가 종내 흩어지니
       快如登太虛(쾌여등태허)   상쾌하기가 마치 허공을 오르는 듯하구나.

 

우리가 한평생을 이승에 머물렀다 가지만, 남는 것이라곤 육신뿐이다. 하지만 이 육신도 곧 흩어져 이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四大(사대)는 물질의 4대 기본 요소인 땅 · 물 · 불 · 바람으로, 인간의 육신을 의미한다.
 
즉 이 시는 몇 가지 물질적 요소에 의해 결합한 육신이 결국은 공허함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人空(인공)을 잘 그려 주고 있는 것이다. 人空을 깨달음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버린 무념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悟'의 경지가 깨달음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참고 >"백척 간짓대 끝에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것도 비록 묘경에 들어섰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窮境的(궁경적)인 眞妙(진묘)는 아니다.
 
백척 간짓대 끝에서 눈 딱 감고 한 발자국 내어 디뎌라! 그때 비로소 시방세계가 온통 내 자신의 반야(본질적 사유)의 빛으로 현전하다."['景德傳燈綠(경덕전등록)' 권10]
 
선의 문턱에서 선의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뒤의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 주관에 의해 표상된 대상의 세계를 끊은 無念이란 대상을 의식하는 主體(주체)와 客體(객체)의 대립 의식을 정지함이지 결코 의식 자체를 끊어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妙悟(묘오)'의 경지란 바로 '生滅滅已(생멸멸이) 寂照現前(적조현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여기서 生滅(생멸)은 주관적인 의식이 세계를 찰나찰나 인식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의식이 滅盡(멸진)될 때 寂照(적조)할 수 있는 것이다.
 
앞의 시에서 스님은 수행을 통해 부처는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것 자체로도 큰 깨달음이지만, 아직 완전한 寂照(적조)의 단계를 읊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에는 네 마음과 내 마음의 구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밖에서보다 안에서 부처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寂滅(적멸)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의식세계가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안과 밖의 구분, 공과 공 아닌 공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진 시를 '妙悟(묘오)' 경지의 시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悟' 경지를 다룬 시로는 다음의 시들을 들 수 있다.
 

     ①
     翫水看山虛送日(완수간산허송일)  물과 산 구경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吟風詠月만勞神(음풍영월만노신)  음풍영월에 부질없이 정신만 수고스럽네.
[만+曼]
 

     豁然悟得西來意(활연오득서래의)  활연히 서쪽에서 온 뜻을 깨달아야
     方是名爲出世人(방시명위출세인)  이로부터 출세인이라 이름할 수 있다네.

 
     ②
     靈山會上梵王天(영산회상범왕천)  영취산 회상의 범천왕
     金色波羅獻佛前(금색파라헌불전)  금색 바라를 부처님께 바쳤다네.

 
     當日覺皇拈示衆(당일각황념시중)  그날 부처님 그것 들고 대중에게 보이시니
     飮光尊者獨怡然(음광존자독이연)  가섭존자만이 씩 웃더라.

 
     ③
     玄玄言外旨(현현언외지)  심오한 말 밖의 뜻이고
     默默靜中存(묵묵정중존)  고요한 침묵 속에 살아가네.

 
     若也從他覓(약야종타멱)  만일 다른 곳에서 찾을 것 같으면
     回頭眼已昏(회두안이혼)  고개 돌리자 눈은 이미 어두워지리.

 
①의 시는 '이름 모를 詩僧(시승)에게 준다'는 제목의 시로, 같은 수행인의 입장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속세를 떠나 산사에 묻혀 오랜 수행을 하고 있는 동료와 서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깨달음에 관한 문답이 여러모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활연히 '西來意(서래의)'를 깨우치게 될 때야 비로소 출가자의 명분이 선다는 一禪(일선)의 말처럼, 깨달음은 출가자에겐 존재의 의의인 것이다.
 
日常事에서 서로간의 情分(정분)을 노래하는 시가 '未悟(미오)' 경지의 시라면, ①과 같이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독려하거나 ③과 같이 깨달음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號를 지어주는 題號詩(제호시)는 '悟(오)' 경지의 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②와 같이 佛敎哲學的(불교철학적)인 용어를 설명하는 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悟' 경지의 시로 보자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불교철학의 기본적인 용어 중의 하나인 '拈花微笑(염화미소)'를 설명하고 있다.
 
즉 釋迦世尊(석가세존)이 靈鷲山(영취산)에서 많은 제자를 거느린 채 설법은 하지 않고 대신 꽃 한 송이를 들고 눈을 깜빡였으나, 大梵天王(대범천왕)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해 망연해 있었다고 한다. 이때 迦葉尊者(가섭존자)만이 석존의 뜻을 알아채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석존은 비로소 입을 열고, "내가 體得(체득)한 교법은 이제 모두 摩訶迦葉(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고 하셨다. 이는 無言(무언)으로 마음을 통하여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후 선종 교법의 요체로 자리하였다.
 
이렇듯 '拈花微笑(염화미소)'와 같은 佛敎用語(불교용어)나 話頭(화두)가 題材(제재)로 들어 있는 시는 佛家漢詩(불가한시)에선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스님들이 이러한 것을 題材(제재)로 삼아 시를 지음은 그것들이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話頭(화두) 자체에는 '妙悟(묘오)'의 경지가 들어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수도자가 그 뜻을 얼마나 느끼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를 지은 작자인 스님의 상태이지 話頭(화두)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용어와 화두를 읊음으로써 깨달음을 향해 전진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시들은 '悟(오)' 경지의 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妙悟' 경지의 시
 

'妙悟' 경지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如實(여실)하게 보는 了悟(요오)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寂滅(적멸)해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없어진 如如不動(여여부동)하게 비추고만 있는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야 시인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지는 '直見不見 直聞不聞(직견불견 직문불문)'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대상을 보지 않고 보는 것 또는 보되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보지 않는다는 것은 見聞覺知(견문각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알되,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단적으로 보고 듣고 아는 無分別(무분별)의 分別(분별)로서의 見聞(견문)을 말하는 것이다.
 
단절된 것은 오직 主客(주객) 대립에서 본 對象的(대상적) 世界일 뿐이지, 그것이 斷滅(단절)된 뒤 높은 것은 높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의 如如(여여)한 實相(실상)의 世界(세계)는 분명히 현전하기 때문이다.
참고>한문-[부끄러울참:+][재재거릴남:+]
 

     平生참愧口남남(평생참괴구남남)   평생 입으로 지껄이던 것 부끄러이 여겼으니
     末後了然超百億(말후요연초백억)   이제야 요연히 많은 생각 뛰어넘네.
 
     有言無言俱不是(유언무언구불시)   유언 무언이 모두 道 아니니
     伏請諸人須自覺(복청제인수자각)   엎드려 청하노니 그대들은 스스로 깨달으소서.

 

이 시는 一禪(일선)의 臨終偈(임종게)로, 한평생 닦은 도가 이 28자 안에 모두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 스님의 눈앞엔 평생 동안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은 수행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 많은 깨달음 중에서도 이제야 참된 깨달음을 말하노니, 그것이 바로 '有言無言俱不是(유언무언구불시)'라는 구절이다. 요연히() 깨우친 至道(지도)는() 유언과 무언이 모두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有와 無의 구분과 그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를 뛰어넘는 寂照(적조)의 경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 >'了然하다'는 말은 '환하고 똑똑하다'는 뜻이다.-한글학회.'우리말 큰사전'.
 

참고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없어 가리고 고르는 것을 싫어한다. 동연히 명백하고, 애와 증하지 않는다. 터럭의 차이도 천지의 차이이니, 현전함을 얻으려면 따르거나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至道無難 有嫌揀擇 洞然明白 但莫憎愛 豪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지도무난 유혐간택 동연명백 단막증애 호리유차 천지현격 욕득현전 막존순역)] - 僧璨大師「信心銘」
 
至道는 유언 속에서도 무언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또 반대로 어느 쪽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至道(지도)란 그냥 그렇게 如如(여여)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窮極地(궁극지)로서의 '妙悟(묘오)'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의 경지에 다름아닌 것이다.
 

    妙性頭頭本現成(묘성두두본현성)  묘한 성품은 무엇에나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靑黃紅白萬般形(청황홍백만반형)  청·황·홍·백 만 가지 형상이로다.

 
    山元默默天元碧(산원묵묵천원벽)  산은 원래 묵묵하고 하늘은 본래 퍼렇고
    水自澄澄月自白(수자징징월자백)  물은 스스로 맑고 달은 스스로 밝다.

 
    春到燕來秋便去(춘도연래추편거)  봄이 오면 제비 왔다 가을이면 가고
    野深人寢曉還醒(야심인침효환성)  밤 깊으면 사람 자고 새벽이면 다시 깨네.

 
    鶴長鳧短天眞體(학장부단천진체)  학의 다리 길고 오리 다리 짧은 것은 천진의 몸이거늘
    陌上農歌是太平(맥상농가시태평)  언덕 위 농부의 노래가 바로 태평일세.

 

여기서 묘한 성품이란 至道(지도)를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본래 그대로 여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산은 묵묵하고, 하늘은 파랗고, 물은 맑고, 달은 스스로 밝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至道를 圓悟克勤(원오극근)은 '向上宗乘中事(향상종승중사)'라는 말로 표현했다.
 
向上은 절대 평등의 경지를, 宗乘(종승)은 禪宗(선종)의 종지를 뜻한다. 즉 주객 대립의 對象知(대상지)가 미치지 못하는 妙存(묘존)의 경지이며, 이론과 언설로써만 접근할 수 없는 言語道斷 心行處滅(언어도단 심행처멸)의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는 현전하는 일체 平等(평등)의 세계로, 취사 선택과 대립 차별의 의식만 갖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경지이다. 단 한 찰나라도 머뭇거리기만 하면 대상으로의 指向(지향)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주객 대립의 세계가 되고,
 
이 속에서 사물들은 인간 위주의 가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체 평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현상계는 如如(여여)할 뿐이다. 계절의 순환도, 밤과 낮의 흐름도 모두가 자유로운 太平(태평)의 경지이다.
 
이는 진각국사가 읊은 "天水混然成一色  望何極更兼秋月蘆花白천수혼연성일색  망하극갱겸추월노화백(수평선 하늘 끝 맞닿아 물이 하늘이요, 하늘도 물이러라. 끝없이 아득한 곳, 게다가 휘영청 밝은 달. 갈대꽃마저 뽀얀 백야러라)"의 경지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양자의 비교 대조에서 이것은 저것보다 높은 것, 저것은 이것보다 낮은 것이라는 가치평가를 붙여서는 안된다.
 
높은 것은 높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 그것대로의 如如함의 입장에서 직관한다면, 사물은 제각기 높은 것, 낮은 것이라는 개념에 포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것 하나라도 밀고 들어올 틈조차 없는 '妙悟(묘오)'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본 연구는 平面的(평면적)인 理論(이론)에다 어떻게 하면 佛家漢詩(불가한시)라고 하는 立體的(입체적)인 예술 장르를 보다 잘 집어 넣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자칫 살아 있는 문학 작품을 마음대로 재단하여 그 생명력을 감소시키는 예들이 주위엔 너무도 많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제 본문의 내용과 본 연구가 갖는 한계점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1) 연구 대상에 대한 용어의 범주화 작업은 본 연구가 가지는 試論的(시론적)인 성격 때문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크게 佛敎文學(불교문학)과 禪詩(선시), 그리고 佛家文學(불가문학)의 입장이 있었는데, 본 연구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佛家文學의 입장이다.
 
佛家文學의 경우, 승려라는 특수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이가 修道(수도) 생활이나 日常事(일상사)에서 느끼는 것을 문학화한 것은 모두 포함할 수 있다. 佛家文學은 일단 창작 주체의 성격을 승려 계층이라고 한 데서 오는, 대상에 대한 접근의 명확성과 용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승려의 作이긴 하지만 속세의 人之常情(인지상정)을 주제로 높은 문학 수준을 지니고 있는 많은 작품에 대해서도 시야를 넓혀 나갈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범주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2) 佛家文學의 입장을 바탕으로 세운 佛家漢詩 批評(비평) 方法論(방법론)은 嚴羽(엄우)의 '以禪喩詩(이선유시)'에서 단서를 찾았다. '以禪喩詩' 방법론은 佛家漢詩(불가한시)가 깨달음이란 특수한 목적의 연장선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각 작품의 주제 및 철학을 깨침이 없는 통속적 견해인 '未悟(미오)'의 경지, 선의 문턱에 들어선 견해인 '悟'의 경지, 선의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뒤의 깨침인 '妙悟(묘오)'의 경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中道論(중도론)의 '否定(부정)의 方法(방법)'과『臨濟錄(임제록)』의 '三玄三要(삼현삼요)', 禪宗(선종) 諸家(제가)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三句法門(삼구법문) 등의 논리와의 직접 대응이 가능함을 검증했다.
 
3) 마지막으로 '未悟(미오)' · '悟(오)' · '妙悟(묘오)'의 경지를 어떻게 실제 佛家漢詩에서 찾아낼 것인가이다. 일단 '未悟' 경지의 시는 佛家(불가)의 日常事(일상사)를 중심으로 세속적인 人之常情(인지상정)을 주제로 하는 시들로 묶을 수 있다.
 
'' 경지의 시는 우리의 신체가 몇 가지 요소의 우연한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人空(인공)과, 이 세상에 固定的(고정적)인 自性(자성)을 가지고 모든 시간을 一貫(일관)하여 지속적으로 自在(자재)하는 것은 없다는 法空(법공)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다.
 
즉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버린 無念(무념)이 형상화된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妙悟' 경지의 시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완전한 寂照(적조)의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다. 寂照(적조)란 주체와 객체의 대립 의식이 정지된 것을 넘어서 의식 자체를 끊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선 현실이 그대로 如如不動(여여부동)하게 비춰질 뿐이다. 그리하여 대상을 보고 듣고 알되,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단적으로 보고 듣고 아는 '無分別(무분별)의 分別(분별)'의 경지를 형상화하게 되는 것이다.
 
'悟'의 단계에서 갖는 分別的인 속성인 空을 觀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진리조차도 사라져버린 완전 無分別의 地境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논의를 전개시키는 도중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悟'나 '妙悟'의 경지에서 씌어지는 日常事에 대한 작품은 '未悟'의 경지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物我一體(물아일체)를 전체의 주제로 내세운 一般 文士(일반 문사)의 작품과 '悟' 경지의 시, '妙悟' 경지의 시는 어떠한 변별점을 지닐 것인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과의 미적 거리 측정, 정신 분석학의 원용 등 다각적인 접근 방법에 의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參 考 文 獻
 嚴羽,『滄浪詩話』
眞覺國師 慧諶,『無衣子詩集』     靜觀 一禪,『靜觀集』     鞭羊 彦機,『鞭羊堂集』
『法華經』,「五百弟子授記品」     『景德傳燈錄』     『禪宗永嘉集』     『碧巖錄』
『高麗史』,「列傳」     『佛光大辭典』     『佛敎學大辭典』, 서울, 弘法院.
李哲敎 外 編纂,『禪學大辭典』, 서울, 佛地社, 1995.
한글학회,『우리말큰사전』, 서울, 어문각, 1993.
高翊晋 篇,『漢譯 佛敎根本經典』, 서울, 寶蓮閣, 1974.
정승석 편,『법화경의 세계』, 서울, 지양사, 1986.
朴惠耕,『법화경 입문』, 서울, 범우사, 1992.
조동일,『한국문학통사』2∼3, 서울, 지식산업사, 1983∼84.
李丙疇 외,『韓國漢文學史』, 서울, 半島出版社, 1991.
高亨坤,『禪의 世界』1∼2, 서울, 운주사, 1995.     李鍾燦,『韓國의 禪詩』, 서울, 二友, 1985.
印權煥,『高麗時代 佛敎詩의 硏究』, 서울, 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83.
金容太,「空思想의 文學的 硏究」, 부산, 부산여대 論文集 4집, 1976.
梁熙哲,「逍遙 禪詩의 開悟體驗 硏究」,『東洋學』6集, 1988.
金賢子,「韓國禪詩의 美的 距離 硏究」, 이대『인문과학논집』61집 1호, 1992.
배규범,「無衣子 慧諶 文學 硏究」, 서울, 慶熙大 碩士論文, 1994.
-----,「滄浪詩話의 漢詩批評 方法論 硏究」,『語文硏究』90호, 서울, 韓國語文敎育 硏究會, 1996.
 

제 5,6집_11 (3/3) 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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