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漢詩 批評 方法論 試考(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
 -'以禪喩詩'論을 中心으로(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
裵  奎  範     경희대 대학원 문학박사과정 수료, 경희대 강사.
「無衣子 慧諶 文學 硏究」,「草衣禪師의 茶詩 考察」,「滄浪詩話 以禪喩詩 考察」

 

       목     차          | (1/3) | (2/3) | (3/3) |
   1. 들어가는 말 ◁ 첫 페이지 (1/2)
   2. 佛敎文學(불교문학)과 佛家文學, 그리고 禪詩(선시)와 佛家漢詩(불가한시)
   3. 佛家漢詩 批評(비평) 方法論(방법론)의 提示(제시)   중간>'悟'의 단계 아래에~
 
      현재 페이지 ▼▽ (2/3) ↙ 두번째
   4. '以禪喩詩(이선유시)' 方法論의 佛家漢詩 適用(불가한시 적용)
      (1) '未悟(미오)' 경지의 詩     (2) '悟' 경지의 詩
 
      ↘ 다음 페이지 (3/3) 세 번째 ▷ (2)중간> 첫째 수의 질문...
      (3) '妙悟(묘오)' 경지의 詩
   5. 나오는 말              參 考 文 獻


          4. '以禪喩詩' 方法論의 佛家漢詩 適用('이선유시' 방법론의 불가한시 적용)
 

앞 장의 논리를 불가한시에 적용시키자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우선 불가의 日常事(일상사)를 중심으로 세속적인 人之常情(인지상정)을 주제로 하는 시들은 '未悟(미오)' 단계의 시에 포함된다. 다음으로 스승에게서 받은 화두를 중심으로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시로 나타내어 스승의 인가를 받고자 하는 悟道頌類(오도송류)의 시들은 '悟' 단계의 詩로 볼 수 있다.
 
좀 포괄적이긴 하지만 오도송을 지어 傳法詩(전법시)를 받는, 혹은 認可(인가)를 받는 과정을 전후로 한 시는 '悟' 단계의 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깨달음이란 고도의 정신적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만큼, 실제 禪宗(선종)에서는 스승이나 대중들로부터 인가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가 과정을 거친 후 森羅萬象(삼라만상)과의 시적 감흥을 통해 지어지는 시들을 '妙悟(묘오)' 단계의 詩로 설정하였다. 물론 깨달음이란 고도의 추상적인 경지를 상정하고, 불가한시를 하나의 기준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일단 본 연구에서는 깨달음을 불교철학에서 보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를테면 三句法門(삼구법문)의 기준 등에 입각해서 가정해 보고자 했다.
 
   (1) '未' 경지의 시
 

앞서 언급한 대로 불가한시의 작가는 승려라는 특정 신분계급이다. 그들의 작품이 신분이 갖는 특수성에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제 작품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본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속세 인간들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그 정체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승려의 문집에서 일상인으로서의 모습을 담고 있는 부류의 작품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현상계에서 가장 저지르기 쉬운, 사물의 개념화에 따른 오류를 드러내고 있는 시들 또한 적지 않다. 본 연구는 승려의 일상인으로서의 모습과 시각을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작품군을 '未悟(미오)' 경지의 시라고 이름붙여 보았다.
 
이 未悟의 경지는 비록 표면상으로 나타난 모습은 속세인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들의 신분이 깨달음이라는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아직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경지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未悟(미오)' 경지의 시는 크게 그 주제에 따라 交友詩(교우시), 離別詩(이별시), 世態詩(세태시), 病老詩(병로시), 望鄕詩(망향시)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참고 >이별시,병로시,망향시 등의 용어는 소재와 주제적인 측면에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賴得星郞手(뇌득성랑수)  정랑의 도움을 얻어
       晋陽開化門
(진양개화문)  진양개화문에 들어섰네.
 
       雨初霑百草(우초점백초)  비는 백화를 적시고
       芽漸發諸根
(아점발제근)  씨앗은 모든 뿌리로 점차 커 가네.
 
       花葉終期菓(화엽종기과)  꽃과 잎들이 종국엔 과일을 기약하듯
       家門永有孫
(가문영유손)  가문도 영원토록 자손이 있으라.
 
       木人猶泣感(목인유읍감)  목인도 감격해 우니
       聊以謝深恩
(요이사심은)  부족하나마 깊은 은혜에 감사드리네.
 
이 시는 고려조 선사 혜심의 것으로, '진양으로 간 후 정랑중()에게 감사함'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정랑중이란 이에게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교가 재가신도의 물질적 지원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참고 >이 시의 '정랑중'은 고려조 문신 정안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高麗史]'列傳(열전)'13券의 鄭世裕條(정세유조)를 보면 "정안이 진양원으로 나갔다가 모친이 연로하여 사직하고 ···<중략>··· 정안은 최이가 권세를 독판치고 남을 시기하는 것을 보고 장래의 해를 피하기 위하여 남해지방으로 퇴거하였다가 불교를 좋아하고 명산과 이름난 사찰을 찾아 다니었다.

 
그리고 사재를 내어 불경을 간행하는데 비용은 정부와 약속하여 절반씩 부담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첫째, 그가 진양원이었다는 점, 둘째 그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점, 셋째 그가 간 남해지방이 수선사가 있는 곳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정안이 이 시의 정랑중일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재가신도는 승려에게 물질적 안정을, 승려는 재가신도에게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상보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혜심이 당대 지성을 대표하는 고승이었고 보면, 당시 정신계를 이끌고 있던 유학자들과의 교유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 사이에는 유불의 경계보다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는 그리움의 정서와 연결된다.
 
     一入深山絶往來(일입심산절왕래)   한번 깊은 산에 들어가 왕래를 끊고
     寒堂獨坐憶高才
(한당독좌억고재)   차가운 마루 홀로 앉아 그대를 그리워했네.
 
     첨前不掃迎賓榻(첨전불소영빈탑)   처마 앞 손을 맞는 걸상 쓸지 않고 [한문; 처마첨]
     溪上空留送客臺
(계상공유송객대)   개천가 손을 보내는 누대만 헛되이 남았구려.
 
     彷佛音容湖外客(방불음용호외객)   호수 밖에 있는데 방불한 음성과 얼굴은
     依稀談笑夢中開
(의희담소몽중개)   어렴풋한 담소 꿈 속에서만 열린다네.
 
     相思又得相思句(상사우득상사구)   그리워하며 상사구 생각해 내어
     吟罷天南斗柄回
(음파천남두병회)   마치매 남쪽 하늘 북성자루가 돌아 있네.
 

이별한 벗에게 부치는 이 시는 수도를 위해 산중으로 들어간 후 벗을 그리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비록 출가를 해 몸은 깊은 산 속에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오르는 인간으로서의 심성을 끝까지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뭔가가 막힐 때는 억지로 막고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풀어 주어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기본적인 선을 지키면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풀어버리는 것도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차갑고 궁핍한 수도 생활은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이에 생각나는 것은 벗들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불가한시는 수도자의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형상화하고 있다.
 
      ①
     雲窓愁對暮山吟(운창수대모산음)  창 앞에서 근심스레 저문 산을 마주해 읊조리나니
     老去秋來病欲深(노거추래병욕심)  늙어 가고 가을은 오고 병은 깊어지려 하네.

 
     草충不識遊人意(초충불식유인의)  풀벌레 나그네의 뜻을 알지 못하고[한문;벌레 훼·충]
     惹起關西萬里心(야기관서만리심)  관서로 향하는 만리의 마음을 일으키도다.
 
     ②
     一別家鄕十五年(일별가향십오년)  한번 고향을 이별한 지 15년
     此來懷古一潛然(차래회고일잠연)  고향생각은 한결 깊었는데

 
     逢人半是不相識(봉인반시불상식)  만나는 이 반은 알지 못하네.
     默思悠悠嘆逝川(묵사유유탄서천)  말없이 생각하며 흐르는 세월 탄식하네.

 
     ③
     大舜慕於知命歲(대순모어지명세)  순임금은 나이 50에도 부모 그리워했고
     老萊戱至縱心年(노래희지종심년)  노래자는 70에도 부모 위해 춤을 추었네.

 
     況今親病以書召(황금친병이서소)  하물며 지금 병든 부모 부르시는데
     何忍留連望昊天(하인유연망호천)  어찌 머뭇머뭇 하늘만 바라보리.

 
①번 시는 병든 나그네의 마음을, ②번 시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③번 시는 병든 부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①번 시는 편양당 언기가 5년간에 걸친 운수행각 중 한양을 떠나 평양성으로 향하기 전 지은 작품이다.
 
서산대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전국을 주유하며 깨달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키는 중의 느낌을 술해한 것이다. 바랑 하나 메고 저자거리를 나선다는 것은 참된 보살행의 시행이나, 산사의 안정된 생활에 비한다면 고통의 연속인 것이다.
 
더욱기 가을이 가져다 주는 객수는 나그네를 외로움의 끝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하다. 특히 고향이나 속세의 인연이 묻은 지역을 지나갈 때 저절로 스며드는 허전함과 그리움은 험난한 수도자의 길을 잘 드러내 준다.
 
출가를 위해 고향을 등진 지 근 15년 만에야 우연히 고향을 지나게 되었을 때, 시인은 말없는 탄식만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비록 부모님이 모두 떠나신, 피붙이라곤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고향이건만 늘상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人之常情(인지상정)인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변해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흐르는 세월을 느끼며 돌아서게 된다.
 
③번 시는 함께 수련하던 동료 스님이 병든 부모를 찾아 떠나는 것을 송별하며 지은 것이다. 작자 혜심의 전기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스님들은 모두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가정이란 틀을 훨훨 벗어버린 고로 인륜, 특히 효에 대한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참고 >진각국사 혜심은 속세에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그런 모친의 간청에 못 이겨 태학에 들어가 마음에 없는 유학을 닦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출가는 홀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보건대, 분명 그는 부모님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순종의 마음을 지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기에 병든 부모의 부름을 듣고도 머뭇거리는 옥상인의 등을 떠밀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효는 속세의 인연이 가져다 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다. 보다 인간다운 성장의 기반 아래 참다운 수행자가 탄생한다는 그만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출가한 몸으로 속세의 인연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명분에 솟아오르는 슬픔을 되삼키며 하산을 망설이는 옥상인도, 또 그의 등을 도닥이며 송별하는 혜심도 모두 인간의 가장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배우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 외에도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해 왔던 불가의 승려는 타락한 현실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하고 있다.
 
     服食驕奢德不修(복식교사덕불수)  의복이 교사한 자 덕을 닦음이 없고
     農公蠶母見幽囚(농공잠모견유수)  농사와 양잠하는 사람에게 죄수가 되네.

 
     從玆擧世受寒餓(종자거세수한아)  이것을 좇으면 온 세상이 추위와 주림을 받나니
     爲報時人信也不(위보시인신야불)  사람들에게 알려라 믿든지 말든지

 
     田蠶不熱已多年(전잠불열이다년)  전잠이 익지 않은 지는 이미 여러 해이고
     饑饉相仍疾疫連(기근상잉질역연)  기근과 유행병은 연이어 생기네.

 
     禍本無門人所召(화본무문인소소)  재앙이란 본시 문이 없이 사람이 부르는 것이언정
     不知自作怨諸天(부지자작원제천)  스스로의 행위는 아지 못하고 하늘만 원망하네.

 
농사와 양잠이 일반 백성들의 주된 수입원이고 보면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된 흉작은 생활을 극도의 빈곤상태로 몰아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연이은 유행병은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의지마저 앗아 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하늘을 탓하려고 하는 위정자들에게 혜심은 일침을 놓고 있다. 의복의 교만하고 사치함은 온 세상을 추위와 굶주림으로 몰고 가는 원인인즉 제 호의호식만을 일삼는 위정자는 모두 백성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천재와 함께 인재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는 백성들을 위해 참된 위정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悟' 경지의 시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절대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實際(실제)를 전제로 그 대상을 表象(표상)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인식 주체가 대상인 산을 본다. 그리고 대상을 논리적 사고에 의해 表象化(표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하여 산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개념화하여 그 내용을 입력시킨다. 이어 다른 산을 보게 되었을 때, 기존에 입력된 산의 개념과 비교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산을 보니 산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경지는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간에 상호 영역의 구별이 뚜렷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主體(주체)와 客體(객체), 能(능)과 所(소)의 구별이 지어진 상태, 이 경지를 앞선 단락에선 '未悟(미오)' 경지로 상정하였다.
 
이 단락에서 다루고자 하는 '悟'의 경지는 이 '未悟'의 경지를 한 단계 뛰어넘은 경지를 말한다. '未悟' 경지가 깨침이 없는 통속적 견해라면, '悟' 경지는 선의 문턱에 들어선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용맹정진 도중 활연히 떠오르는 깨달음, 즉 주객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시로 노래한 시를 '悟' 경지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悟' 경지가 시로 형상화되는 양상을 보면, 대체로 修道(수도) 중 깨달음을 우연히 읊은 시,
 
話頭(화두)나 佛敎哲學(불교철학)의 용어를 설명하는 시, 동료나 제자의 수도를 격려하거나 法號(법호)를 내려주는 題號詩(제호시) 등으로 나타난다. 우선 수도 도중의 깨달음을 시로 나타낸 것이다.
 

       雲鎖聲聞洞(운쇄성문동)   구름은 성문동을 에워싸고
       雨垂彌勒峰(우수미륵봉)   비는 미륵봉에 드리웠네.

 
       山深塵事少(산심진사소)   산 깊어 세속의 일 적으니
       觀察不空空(관찰불공공)   공 아닌 공을 살피네.

 
       佛在爾心頭(불재이심두)   부처는 네 마음 꼭대기 있건만
       時人向外求(시인향외구)   세상 사람들 밖에서만 찾으려 하네.

 
       內懷無價寶(내회무가보)   안으로 큰 보물을 품고서
       不識一生休(불식일생휴)   일생의 부질없음을 아지 못하는구나.

 

이 시에는 안개가 낮게 깔린 암자에 홀로 앉아 수행하는 스님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우선
 
첫째 수에서 스님은 空(공)에 대해 참구하고 있다. 이 시는 古典詩歌(고전시가)의 일반적인 구성인 先景後事(선경후사)를 잘 따르고 있다. 바로 起句(기구)와 承句(승구)에선 구름 낀 聲聞洞(성문동)과 비 내리는 彌勒峰(미륵봉)에 대한 敍景 描寫(서경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轉句(전구)와 結句(결구)에서는 도 닦는 수도승을 살피고 있다.
 
속세와 단절된 산사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수도승과 如如(여여)한 자연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조화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수도승이 탐구하는 진리는 '不空空(불공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 '공'과 '공 아닌 공'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다음 수로 이어진다.
 
둘째 수는 첫째 수의 과정을 거쳐 깨달은 바를 시어화하고 있다. 즉 空의 다른 이름인 부처[佛]는 자신의 마음속에만 있다는 것이다. 이어 법당이나 불상 등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외계에 부처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만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큰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미혹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法華經(법화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한 사람이 있어, 친구의 집에 이르러 술에 취해 드러눕게 되었다. 그때 친구는 관청에 일이 있어 바로 나가야 했으므로, 無價(무가)의 寶珠(보주)를 그의 옷 속에 꿰매어 주고 떠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취해 누워 있었으므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일어나서 遊行(유행)하여 他國(타국)에 이르렀다. 그러는 도중 그는 노자가 떨어져 밥과 옷을 구하기 위해 애썼으나 몹시 힘들어 고난이 그치지가 않았으며, 만일 조금이라도 얻게 되면 매우 만족하였다.
 
후에 친구는 이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이를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이 변변찮은 친구야, 어찌 衣食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나. 나는 예전에 자네가 안락을 얻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게끔 과거 자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 구슬을 자네 옷 속에 꿰매어 주었네.
 
그것이 아직도 있을 터인즉 자네는 알지 못하고 고생하고 근심하면서 옷과 밥을 찾아 헤매는가. 몹시도 어리석구만. 자네는 이제 이 보물로 원하는 곳으로 가서, 늘 뜻대로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게."
참고 >「法華經」'五百弟子授記品'
 
이것은 法華七喩(법화칠유) 중의 하나인 '衣珠喩(의주유)'로, 二乘(이승)이 과거 大通智乘佛(대통지승불) 때 大乘敎(대승교)의 種因(종인)을 받았으나 無明(무명) 번뇌로 인하여 그것을 알지 못하고 지금 法華會上(법화회상)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깨달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들은 '衣珠喩(의주유)' 속의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無價(무가)의 寶珠(보주)가 우리들 마음속에 깃들여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사물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게 된다.
 
佛性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부처님, 즉 완전한 지혜와 덕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모든 인간의 본체에는 우주의 대생명에 의해 살리어지고 있는 절대 평등한 불생불멸의 생명이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식주에 쫓겨 일하며, 또 욕망을 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 몸과 마음만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시가 바로 [留隱仙偶吟(유은선우음)]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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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6집_11 (2/3) 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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