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漢詩 批評 方法論 試考(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
 -'以禪喩詩'論을 中心으로(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
裵  奎  範     경희대 대학원 문학박사과정 수료, 경희대 강사.
「無衣子 慧諶 文學 硏究」,「草衣禪師의 茶詩 考察」,「滄浪詩話 以禪喩詩 考察」

 

       목     차          | (1/2) | (2/2) | (3/3) |
   1. 들어가는 말 ◀ 첫 페이지 (1/2) ↙ 현재 페이지
   2. 佛敎文學(불교문학)과 佛家文學, 그리고 禪詩(선시)와 佛家漢詩(불가한시)
   3. 佛家漢詩 批評(비평) 方法論(방법론)의 提示(제시)   중간>'悟'의 단계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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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以禪喩詩(이선유시)' 方法論의 佛家漢詩 適用(불가한시 적용)
      (1) '未悟(미오)' 경지의 詩     (2) '悟' 경지의 詩
 
      ↘ 다음 페이지 (3/3) 세 번째 ▷ (2)중간> 첫째 수의 질문...
      (3) '妙悟(묘오)' 경지의 詩
   5. 나오는 말              參 考 文 獻


      1. 들어가는 말
 
본 연구의 기본적인 목적은 佛家文學(불가문학)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佛家文學이라고 하면, 僧侶(승려)라는 특수한 作家群(작가군)이 佛敎的(불교적)인 내용을 文學(문학)이란 틀 속에 形象化(형상화)해 낸 것을 의미한다.
 
한국 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문학 유산에 비해 그 연구는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불가문학이 갖는 이중성 때문이다.
 
불가문학은 앞서 언급한 대로 깨달음을 전제로 出家(출가)라는 독특한 通過祭儀(통과제의)를 거친 작가에 의해 지어진 예술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작가의 世界觀(세계관)은 고도의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佛家文學의 연구는 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합적인 연구 분야인 것이다. 실재 지금까지의 佛家文學(불가문학)에 대한 연구는 작가와 그 주변적인 사실을 통해 문학 작품을 보는, 소위 印象批評(인상비평)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佛家文學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 본 연구는 불가문학의 여러 장르 중 佛家漢詩(한시)로 논의의 대상을 한정하고자 한다.
 
佛家漢詩는 漢詩(한시)라고 하는 형식에 佛家(불가) 특유의 철학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新羅朝(신라조) 義湘(의상)과 元曉(원효)를 필두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 한문학 장르이다.
 
그리고 佛家漢詩(불가한시)는 '不立文字 見性成佛(불립문자 견성성불)'을 표방하는 禪宗(선종)의 교리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佛家漢詩 批評(비평)의 새로운 방법론을 세우기 위해 기존의 연구들 중 특히 용어에 대한 명확한 범주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선 기존의 연구에서 연구 대상에 대한 명칭을 佛敎詩(불교시), 佛家詩(불가시), 禪詩(선시) 등으로 혼용하여 쓰고 있는 용어에 대한 범주상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점 지적은 전체 연구의 올바른 방향성을 찾는 데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올바른 범주화를 바탕으로 佛家漢詩 批評(비평)의 새로운 方法論(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방법론은 南宋(남송)의 詩論家(시론가) 嚴羽(엄우)가 지은 滄浪詩話(창랑시화)에 언급된 '以禪喩詩(이선유시)'에서 착안점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以禪喩詩'의 방법론이 실제 佛家漢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한다. 작품을 통한 검증이 따르지 않는 방법론은 의미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以禪喩詩' 방법론에 대한 적용은 靜觀一禪(정관일선)의 精觀集(정관집)과 慧諶(혜심)의 無衣子詩集(무의자시집)의 漢詩(한시)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2. 佛敎文學과 佛家文學, 그리고 禪詩와 佛家漢詩
 

佛敎文學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한문학 장르에 비해 더디게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별 작품에 대한 언급이 간혹 있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야 '불교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연구 대상에 대한 범주화의 측면에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볼 때, 크게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조동일은 불가문학에 대해 '한국문학통사' 2권과 3권(서울,지식산업사,1983~1984)에서 '불교문학의 새로운경지'와 '불교, 도교, 천주교 문학'이라는 항목으로 언급했다. 그후로는 이병주 외, '韓國漢文學史'(서울,반도출판사,1991)가 있다.
 
바로 '佛敎文學'인가, '佛家文學'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용어의 구분은 본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佛敎文學이라는 용어는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모든 문학 장르의 작품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작품의 주제나 내용, 그리고 소재에 의해 佛敎文學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佛敎文學을 宗敎(종교)文學의 큰 범주 아래에서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한 일종의 目的文學(목적문학)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주제나 소재에 따라 범주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편리성을 가진다. 그리고 실제 현재 진행된 대다수의 연구가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佛敎文學의 입장은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품론으로 들어가면 큰 문제점을 가진다.
 
그것은 불교의 철학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 그리고 文學(문학)의 예술적 측면이 만날 때 생겨나는 연구 방법상의 혼란이다. 이렇게 연구의 범위가 다양한 측면을 가지기 때문에 어느 측면에 논의의 초점을 맞출 것인가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佛敎文學의 경우, 당장 부딪히는 문제는 불교적 깨달음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儒家 文士(유가 문사)와 佛家 僧侶(불가 승려)가 읊었을 때 생기는 미세한 차이를 찾아내기란 여간 난해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佛敎哲學(철학)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이며,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선 印象批評(인상비평)의 수준을 넘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또한 장르와 시대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文學史에서 佛敎文學이 어떻게 기술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에 반해 佛家文學은 작품 창작의 주체가 승려로 한정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승려라는 특수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이가 修道(수도) 생활이나 日常事(일상사)에서 느끼는 것을 문학화한 것은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佛家文學은 일단 창작 주체의 성격을 승려 계층이라고 한 데서 오는, 대상에 대한 접근의 명확성과 용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승려의 作(작)이긴 하지만 속세의 人之常情(인지상정)을 주제로 높은 문학 수준을 지니고 있는 많은 작품에 대해서도 논의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등 전체적인 연구의 시야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다. 佛家文學의 하위 장르는 일반적인 문학의 장르 규정에 따를 수 있다.
 
이상의 용어 외에도 우리는 흔히 禪詩(선시)라는 용어를 자주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禪詩'라고 하면, 선적 깨달음을 시화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高麗朝(고려조) 知訥(지눌) 이후로부터 禪敎(선교) 兩宗(양종)이 통합된 世宗代(세종대)를 거쳐 지금까지 韓國佛敎의 대표격을 유지하고 있는 종파가 禪宗(선종)이고 보면, 일면 타당성을 지닌 용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禪詩(선시)라는 용어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타당성을 잃고 있다.
 
첫째, 선종과 교종의 교리가 비록 형태상 차이점이 있더라도 기본적인 시각과 전체적인 구도는 동일하다.
 
둘째, 실제 작품에서 표현되는 양상 역시 교종 승려와 선종 승려의 뚜렷한 변별점이 찾아지는 것
이 아니다.

 
셋째, 禪詩의 경우 佛敎文學이 갖는 모순점을 그대로 갖게 된다. 즉 禪詩라는 용어는 다분히 편의에 의해 비전문적으로 부르다 일반화된 용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실제 작품의 비평에 있어서 가장 타당하면서도 현실적인 용어는 佛家文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佛家文學의 입장에서, 특히 그 중 佛家漢詩 작품의 비평론을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3. 佛家漢詩 批評 方法論의 提示
 
본 연구에서 佛家漢詩 批評(비평)의 方法論(방법론)을 세우는 단서로 이용한 것은『滄浪詩話(창랑시화)』에서 언급된 '以禪喩詩(이선유시)'()라는 용어이다.
 
참고>"아. 정법안이 세상에 전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당시를 말하고 창하지 않았으나, 당시의 도가 혹 때로는 밝혀질 수 있었다. ··· 그런 까닭에 내가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시의 宗旨(종지)를 정하였고,
 
또 선을 빌어 써 비유하였으니, 한위 이래의 시를 근원으로 미루어 끊어 마땅히 盛唐(성당)으로써 법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滄浪詩話(창랑시화)」'詩辨(시변)' : ··· 且借禪以爲喩推原漢魏以來(차차선이위유추원한위이래) ···]
 
대표적 시론집의 하나인 [滄浪詩話(청렁시화)]는 南宋(남송)의 詩論家(시론가) 嚴羽(엄우)의 作이다. [滄浪詩話]는 기교와 수식만을 일삼음으로써 姑息的(고식적)이 된 當代(당대)의 文風(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송대의 많은 시화들 중 특히 [창랑시화]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 진술 방식에서 불교, 즉 선의 논리를 빌어서 시풍이나 시학습 및 시비평에 대한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엄우의 논리에 착안하여 '以禪喩詩(이선유시)' 방법론을 세워 보고자 한다.
 
방법론 전개의 전체적인 모습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엄우의 논리는 어떠한 것인가,
둘째, 엄우의 이론에 보강할 점은 없는가, 셋째, 이 이론은 불교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니는가가 그것이다.
 
첫째, 엄우의 논리에서 골격에 해당하는 것은 크게 '妙悟(묘오)'와 '悟(오)'의 구분이다. '妙悟'로 가느냐 아니면 '悟'에서 그치고 마느냐가 시의 풍격을 결정짓는 잣대가 된다.()
 
참고 >이 과정은 엄우가 앞서 밝힌 시를 배우는 세 가지 단계에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고 멋대로 쓰고 보는 처음 단계와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하여 시 짓기가 위축되는 두 번째 단계는 悟(오)의 단계에 해당되고, 투철 · 신수해져 쓰는 것이 곧 도인 세 번째 단계는 妙悟(묘오)의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를 배움에는 세 가지 節目(절목)이 있는데, 그 처음은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여 연이어 짓고 자주 읽고 멋대로 써서 이루는 것이다(그 다음으로) 이미 부끄러움을 알면 비로소 萎縮(위축)이 생겨 이루기가 극히 어렵다.
 
(마지막으로) 透徹(투철)해지면 七縱八橫(칠종팔횡)하고 信手(신수)하여 쓰는 것이 곧 道(도)가 되는 것이다." [滄浪詩話(창랑시화) '詩法(시법)']
 
즉 단순히 '悟'의 단계만으로는 '入神(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으며, 여기에 '妙'가 가해질 때 참다운 '入神'의 경지가 된다는 것이다.
 
참고 >여기서 '입신'이란 선의 영역에서 열반이 궁극지이듯 詩(시)에서의 궁극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시의 극치는 하나가 있는데, 入神(입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다하여 더할 것이 없게 된다." [滄浪詩話(창랑시화) '詩辨(시변)']
 
그러면 엄우는 '悟'와 '妙悟'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대저 禪道(선도)는 오직 妙悟(묘오)에 있고, 詩道(시도) 역시 묘오에 있다. ··· 깨달음〔悟〕에는 深淺(심천)이 있고, 한계가 나누어짐이 있으며, 투철한 깨달음이 있고, 단지 一知半解(일지반혜)의 깨달음이 있다. ··· 漢 · 魏(위)는 존귀하여 거짓 깨달음이 아니며,
 
謝靈運(사령운)으로부터 盛唐(성당) 제공에 이르기까지는 투철한 깨달음이 있다. ··· 다른 것은 비록 깨달음이 있으나 모두 第一義(제일의)가 아니다.
 
'妙悟(묘오)'와 '悟(오)'의 구별은 깨달음을 기준으로 다분히 그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엄우는 깨달음에도 깊이의 차이와 한계가 있어 透徹之悟(투철지오) · 一知半解之悟(일지반해지오)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즉 詩境(시경)에도 등급이 나누어지듯 시인이 흥취를 깨달음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禪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설명하는 '十二因緣說(십이인연설)'()과도 비교가 가능하다.
 
참고 >'十二因緣說(십이인연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輪廻(윤회)의 이론을 알아야 한다. 윤회는 본래 산스크리트어로 상사라(Samsara)이다. 이는 우리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三界와 六道를 해매이면서 마치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붓다 이전부터 인도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사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영원히 윤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당시 인도사상에서 통용되던 윤회설의 한계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五蘊(오온), 즉 정신과 물질의 작용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존재인데, 그 정신과 물질을 결합시키는 기본적인 힘인 業에 의해 생멸이 지속된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마치 장작에 붙은 불이 바람의 힘에 의해 다른 장작에 옮겨 붙듯이 육체라는 땔감에 붙은 정신이라는 불이 業力(업력)의 바람에 의해 서로 因(인)이 되고 果(과)가 되면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高翊普 篇,「漢譯 佛敎根本經典」'阿含經精選',1974.]
 
'因緣(인연)'이란 것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한 끝에 도를 이루고 見性成佛(견성성불)한 그 깨달음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因緣을 따라 生滅(생멸)한다는 것이다.
 
'십이인연'의 시작은 無明(무명)으로부터인데, 무명은 無知와 같은 뜻으로 진리에 미혹하여 사물의 도리를 옳게 알지 못하는 최초의 한 생각[一念]을 말한다. 이 무명의 한 생각이 일체의 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惡業(악업)을 짓게 된다.
 
이 악업으로 말미암아 괴로운 결과를 받으므로, 무명은 일체 번뇌의 근본인 동시에 악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명을 끊게 되면,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에 걸친 영원한 생사의 근본이 끊어져서 다시는 미혹의 세계에 윤회하지 않고 완전한 괴로움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禪에서 涅槃(열반)에 이르기 위해 無明(무명)의 사슬을 끊어야 하듯이, 詩에서는 '入神(입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悟'의 여러 지경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엄우의 논리를 실제 佛家漢詩에 적용하는 데에 문제점은 없는가하는 점이다. 본 연구와 같은 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佛家漢詩를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자는 데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佛家漢詩는 일단 창작층이 스님들로 한정되어 있다.
 
스님들은 佛道라는 확고한 경지를 얻기 위해 출가라는 通過祭儀(통과제의)를 거친 사람들이다. 따라서 佛家漢詩는 '도의 깨우침[悟]'이라는 경지와는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종의 목적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佛家漢詩 전체가 이런 목적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求道者(구도자)의 모습 이전에 日常人(일상인)으로서의 모습 또한 벗어버리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재로 불가한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交友詩(교우시)라든가 人情詩(인정시) 등 일상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극히 俗世的(속세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은 것과 禪的(선적)인 취향을 담은 脫俗的(탈속적)인 시로 나누어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탈속적인 내용의 시도 진정한 깨우침의 경지에서 나온 시냐 아니면 거기에 접근해 가는 과정 속에서의 시냐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엄우가 전개한 悟와 妙悟(묘오)의 구분만으로는 불가한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불가의 일상사를 중심으로 세속적인 人之常情(인지상정)()을 주제로 하는 시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참고 >禪家의 시를 내용상으로 분류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人之常情의 시'에는 交友詩(교우시) · 世態詩(세태시) · 人情詩(인정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悟'의 단계 아래에 '未悟(미오)'의 단계를 추가로 설정해 보았다.
 
'未悟'는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미래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철학을 담고 있는 용어라기보다는 '妙悟(묘오) → 悟(오) → 未悟(미오)'로 이어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논리가 불교철학적으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부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妙悟→悟→未悟'의 논리는 불교철학의 소위 三句法門(삼구법문)의 논리 중
 
특히 中道論(중도론)의 '否定的(부정적) 方法'과 臨濟錄(임제록)의 '三玄三要(삼현삼요)', 禪宗諸家(선종제가)의 일반적 논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三句法門의 논리는 불교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 '正-反-合(정-반-합)'의 辨證法(변증법)과도 유사한 체계를 갖기 때문이다. 먼저 中道論의 경우이다.
 
열반 상태에 대한 여러 종파의 설명이 있는데, 그들 중 中道論(法相宗: 법상종)은 '否定的 方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中道인 불생불멸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한 첫 단계로 두 개의 대립 개념이 설정되는데, 眞諦(진제)와 俗諦(속제)가 그것이다.

 
眞(진)과 俗(속)은 높고 낮음을, 諦는 실다운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성자가 본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을 말한다. 따라서 진제는 '出世間法(출세간법)'이요, 俗諦(속제)는 '世間法(세간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제와 속제는 여러 층차를 가지고 있어 그 층차는 지속적으로 교차될 수 있다.
 
첫번째 층차에서 범인들은 만물을 실재하는 것[有]으로만 알고, 그 반대는 알지 못한다[俗諦]. 불타는 범인에게 모든 사물이 無이고 空이라고 가르쳤다. 이때 전자는 俗諦이고, 후자는 眞諦이다.
 
두번째 층차는 이러한 '모든 사물이 有이다, 無이다'를 떠난 단계이다. 즉 사물을 한 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有나 無라는 것은 속제에 속한다.
 
반면 一邊的(일변적)이 아닌 中道(非一邊的 中道)에서 볼 때 사물은 有도 無도 아니라는 것[非有非無]이 진제가 되는 것이다.
 
세번째 층차는 非一邊的(비일변적) 中道 역시 일변적이라는 논리에서 시작된다. 즉 一邊과 非一邊의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非有와 非無가 속제가 된다. 따라서 진제는 비유도 비무도 아니다는 非非有非非無(비비유비비무)가 되는 것이다.
 
즉 이상의 논리는 일체를 부정하는 그 부정까지를 포함해서 일체가 부정될 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四句百非'라고도 표현하는 것으로, 간략히 말하자면 '有→無→非有非無→亦有亦無(역유역무)'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十牛圖(십우도)의 논리이다. 十牛圖는 남송대의 廓庵師遠(곽암사원)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송대의 불교 대중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기 위해 열 가지 그림을 그리고 거기다 頌(송)을 붙였다.
 
즉 佛性을 소에다 비유하여 이것을 깨치겠다고 생각하는 단계[初發心(초발심)]에서부터 깨달음조차 초탈하고 대중 교화에 나서는 단계까지를 열 가지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중 소를 찾는, 즉 불성을 찾아 보려고 나서는 단계인 尋牛(심우)에서 깨우친 자의 발자취를 찾아[見跡(견적)], 견성[見牛(견우)]하는 단계까지를 '未悟(미오)'의 단계로 보았다.
 
그후 불성을 얻어[得牛(득우)], 그 불성으로 완전[牧牛(목우)]하게 되면 그것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騎牛歸家(기우귀가)]. 집이란 자기 본래의 불성을 말하며,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어 忘牛存人(망우존인)에서는 불성조차 잊어버리게 되고, 차츰 자기의 불성도 공도 깨치는 人牛俱忘(인우구망)에 다다른다.
 
이는 깨달음의 진정한 실체에 접근한 단계로서 詩作(시작)에서 '悟(오)'의 단계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십우도는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므로, 깨달음의 과정은 계속된다.
 
자기가 선승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反本還源(반본환원)과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저자거리로 나서는 入廛垂手(입전수수)까지 가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시에서의 '入神(입신)'의 단계요, '妙悟(묘오)'의 단계이다.()
 
참고 >굳이 따지자면, 제1 단계 尋牛(심우)는 발보리심의 지경, 제2 단계 見跡(견적)에서 제6 단계 騎牛歸家(기우귀가)는 수행의 지경,
 
제7 단계인 忘牛存人(망우존인)과 제8 단계인 人牛俱忘(인우구망)은 成菩提心의 지경, 제9 단계인 反本還源(반본환원)은 入涅槃의 지경,
 
제10 단계인 入廛垂手(입전수수)는 方便究竟의 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대중구제라는 입장에서 십우도를 '妙悟-悟-未悟'의 단계에 적용시켜 본 것으로, 견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假悟(가오)'의 단계가 '悟(오)'의 단계를 거치게 되어, 결국은 '妙悟(묘오)'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논리에서 시작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는 자기 부정의 단계를 거쳐,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는 통일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得道(득도)한 후에 바라보는 산은 그 옛날의 산이 아닐 것이요, 물 또한 그러할 것이다. 눈앞의 현상계는 그대로이건만, 인식하는 주체가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새로운 경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언급한 方法論(방법론)의 전체적인 모습은 [표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嚴羽의 詩論과
그 보강

佛家 漢詩
불가 한시

中道論
중도론

臨濟錄
임제록

禪宗諸家
선종제가

十牛圖
십우도


分別地

入神(=妙悟)
입신(묘오)

漸修로 인해
證得한 詩

亦有
亦無

玄中玄
현중현

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入廛垂手

反本還源

分別地
(분별지)

頓悟를 前後로 한
詩 (예: 悟道頌)

非有
비유
非無
비무

句中玄
구중현

見山不是山
견산불시산
見水不是水
견수불시수

人牛俱忘

忘牛存人

騎牛歸家

牧牛

得牛

未悟
(미오)

俗世的인
人之常情의 詩

有·無

體中玄
체중현

見山是山
見水是水

見牛

見跡

尋牛


   4. '以禪喩詩' 方法論의 佛家漢詩 適用 ->>>다음장으로 ->>계속 ->(2/3)

제 5,6집_11 (1/3) 불가한시 비평 방법론 시고[이선유시'논을 중심으로]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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